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 사랑을 부어주시는 주님으로 인해 나 자신을 용납하고 다른 사람이 거닐 공간이 내 안에 마련되는 것.. 내게 주어진 삶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말미암은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 예수님이 나의 중심에 와계신 것이 너무 큰 위로이자 힘이 됩니다ㅜ.ㅜ
영상을 보며 '나는 정말 좋은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그마저도 제게는 또 하나의 과제처럼 느껴졌지만, 그 힘은 나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과 부활의 소망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에 큰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무언가를 해내는 일에 자신이 없고 의존적인 성향이 강했던 저에게, 언제나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안심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저를 새롭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지만, 동시에 삶 속에서 선한 선택을 하기 위해 어떤 훈련과 실천이 필요한지 계속해서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기를 기다리기만 하기보다, 그 은혜에 응답하며 오늘 제가 감당해야 할 순종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몇 년 전, 깊은 터널을 지나는 듯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잔잔했던 삶에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우울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를 가장 괴롭혔던 사람은 어쩌면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나는 힘든 상황을 성숙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나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지금은 그 터널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와 그 시간을 돌아봅니다.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여러 힘든 일로 여력이 없던 나를 나는 돌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왜 이것밖에 견디지 못하느냐”고 비난하며 나 자신을 더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때의 나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당시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강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말해주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돌보지 못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당시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강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말해주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 많은 공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간구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강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강함이 되어주신 하나님이 오늘 이 선생님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계실까요?"터널"에 있는 자신을 굳어진 과거의 기억에서 오늘 다시 돌본다면 그 자신에게 마음껏 위로와 격려를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선생님은 이미 지금, 마음 한 구석에서 '터널' '엄격한 잣대' '비난' 등등에 억눌려 있는 파트에게 따듯한 돌봄으로 다가가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이 자기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구범준씨처럼 손이 골절되는 정도의 극단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저에게 있어서는 우울감과 의욕 상실, 가족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 등도 결국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무너뜨리는 자기파괴의 한 형태인것 같습니다.
강의에서 말한 것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이 존재하고, 그 선택이 반복되면서 결국 나의 태도가 형성된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읽고 감정에 이름을 붙여 객관화하는 과정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구범준씨의 강연 자체도 유익했지만,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풀어낸 내용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셀프(Self)’를 영혼의 좌소인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 마음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관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감정을 다스리는 힘은 단순한 자기 통제력이나 마음 훈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실 때 정신의…
욕구를 정확히 아는 것은 말과 행동이 길을 잃지 않게 한다. 또한 물리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뒤에 있는 본질적인 영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 위에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시며 온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왜 결국은 예수이고 복음인지. 왜 부분들과 중심을 나누고 알아야 하며 내면을 정확하게 읽는게 어떤 필요가 있는지, 오늘 올려주신 두 가지 내용을 통해 '내 안의 세파트' 부분이 정리가 됩니다. 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 사랑을 부어주시는 주님으로 인해 나 자신을 용납하고 다른 사람이 거닐 공간이 내 안에 마련되는 것.. 내게 주어진 삶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말미암은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 예수님이 나의 중심에 와계신 것이 너무 큰 위로이자 힘이 됩니다ㅜ.ㅜ
영상을 보며 '나는 정말 좋은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그마저도 제게는 또 하나의 과제처럼 느껴졌지만, 그 힘은 나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과 부활의 소망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에 큰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무언가를 해내는 일에 자신이 없고 의존적인 성향이 강했던 저에게, 언제나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안심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저를 새롭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지만, 동시에 삶 속에서 선한 선택을 하기 위해 어떤 훈련과 실천이 필요한지 계속해서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기를 기다리기만 하기보다, 그 은혜에 응답하며 오늘 제가 감당해야 할 순종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몇 년 전, 깊은 터널을 지나는 듯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잔잔했던 삶에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우울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를 가장 괴롭혔던 사람은 어쩌면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나는 힘든 상황을 성숙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나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지금은 그 터널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와 그 시간을 돌아봅니다.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여러 힘든 일로 여력이 없던 나를 나는 돌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왜 이것밖에 견디지 못하느냐”고 비난하며 나 자신을 더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때의 나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당시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강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말해주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돌보지 못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감정이 자기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구범준씨처럼 손이 골절되는 정도의 극단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저에게 있어서는 우울감과 의욕 상실, 가족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 등도 결국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무너뜨리는 자기파괴의 한 형태인것 같습니다.
강의에서 말한 것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이 존재하고, 그 선택이 반복되면서 결국 나의 태도가 형성된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읽고 감정에 이름을 붙여 객관화하는 과정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구범준씨의 강연 자체도 유익했지만,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풀어낸 내용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셀프(Self)’를 영혼의 좌소인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 마음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관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감정을 다스리는 힘은 단순한 자기 통제력이나 마음 훈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실 때 정신의…
욕구를 정확히 아는 것은 말과 행동이 길을 잃지 않게 한다. 또한 물리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뒤에 있는 본질적인 영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 위에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시며 온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왜 결국은 예수이고 복음인지. 왜 부분들과 중심을 나누고 알아야 하며 내면을 정확하게 읽는게 어떤 필요가 있는지, 오늘 올려주신 두 가지 내용을 통해 '내 안의 세파트' 부분이 정리가 됩니다. 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