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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뒤집으실 때: 고린도전서 1:1–31 묵상



하나님이 세상을 뒤집으실 때

고린도전서 1:1–31 묵상

(성서유니온 매일성경 — 6월 1일–3일)


여러분의 존재 가치는 어디서 나올까요?


우리는 저마다 그 답을 쌓아 올립니다. 학벌과 경력, 다른 사람들의 인정, 사회적 지위, 혹은 신앙 안에서의 업적으로 그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합니다. 1세기 고린도 역시 그런 도시였습니다. 마치 지금의 뉴욕과 같았습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번화한 항구 도시, 지식과 웅변이 곧 권력이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 도시에 편지를 씁니다. 왜냐하면 재력과 실력을 모두 겸비한 고린도 교회는 아주 많은 문제를 떠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지 앞부분에서 바울은 책망의 말을 한마디도 꺼내기 전에, 먼저 고린도 성도들이 누구인지를 선언합니다. 정체성이 행동보다 늘 먼저 다뤄져야 합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1:1–9)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전서 1:2, 개역개정)

바울은 편지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파를 일으키고 소송을 걸고 음행을 용납하는 여러분에게." 물론 바울은 문제를 다룰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는 그들의 정체성을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의 존재와 정체성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룩함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을 봅니다. 문제를 코칭하지 않고 사람을 코칭하라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이 문제 많은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의 가능성을 더 잘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엉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교회의 상태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깨닫는 순간, 우리 삶에는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실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시니, 이제 내 삶을 함께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라이프 코치로서 제가 여러분께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래 지속되는 변화는 결코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조장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정체성이 행동에 앞섭니다. 복음은 우리가 들어오는 문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입니다.


분열의 스캔들 (1:10–17)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0)

고린도 성도들은 분열되었습니다. "나는 바울 파," "나는 아볼로 파," "나는 게바 파," "나는 그리스도 파" (12절). 심지어 마지막 그룹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기 당파의 깃발로 삼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반응은 거의 황당하다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3절).

이것은 단순히 사이 좋게 지내자는 호소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논증입니다. 교회의 분열은 관계적 문제일 뿐 아니라, 신학적 모순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이시고, 우리 모두가 동일한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그분께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의 분열은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복음만이 진정하고 지속적인 연합의 유일한 토대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다른 모든 공동체의 토대들(예: 공유된 문화, 정치, 감성, 신학적 진영)은 결국 균열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서로에게 공통적으로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 위에 세워진 연합만이 오래 갑니다(Center Church [Zondervan, 2012]).


한 가지 여쭙습니다. 여러분의 중심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어떤 신학적 진영, 어떤 목회자, 어떤 사역 브랜드를 중심으로 우월감과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낯선 것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어리석음 (1:18–3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18)

"미련한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영어 "moron(바보)"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지적 세련됨을 자랑하던 헬라인들에게, 우주의 창조주가 공개 처형을 통해 세상을 구속하신다는 생각은 설득력이 없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는 스칸달론(skandalon) — 걸림돌,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 —이었습니다(23절). 그러나 바울은 이 걸림돌을 부드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듭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1:25)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가장 "약한" 순간을 인류 최고의 지혜 옆에 놓아도, 십자가가 이긴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무조건.


성경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십자가를 모든 구속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이해했습니다. 죄와 죽음의 옛 시대가 그 뿌리에서 꺾이고 새 창조가 이 세계 안으로 돌입한 순간으로 말입니다. 즉, 십자가는 설명되어야 할 "실패"가 아닙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가장 압축된 형태입니다.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Eerdmans, 1948)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1:26)

하나님은 세상이 이미 지나쳐 버린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인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펙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도록(29절). 그리고 그 결론이 이 장 전체의 복음 요약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1:30)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되어 주신 것들:

  • 지혜 — 삶을 바르게 분별하는 눈

  • 의로움 —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 확보됨

  • 거룩함 — 그분의 형상을 닮아 가는 변화, 진행 중

  • 구원함 — 종노릇에서의 해방, 이루어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 안에서가 아니라, 그분 안에서 발견됩니다. 존 파이퍼는 이것을 "더 열심히 노력하는 기독교"와 "더 깊이 신뢰하는 기독교"의 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자는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후자는 무한한 원천에서 길어 올립니다(Desiring God [Multnomah, 1986/2011]).


우리도 바울과 함께 예레미야 9:24로 마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1:31)


코칭 질문

고린도전서 1장은 단순히 교회 갈등에 관한 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인간의 자랑에 무엇을 하는가 — 그리고 그 자리에 무엇을 주는가 — 에 관한 장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가치 체계를 뒤집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지혜에 이르는 길은 어리석어 보이는 것을 통과합니다. 진정한 강함에 이르는 길은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칼뱅은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바울의 목적이 인간의 지혜와 자기 가치에 대한 모든 신뢰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만을 신뢰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모욕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해방적인 진리입니다.


1. 나는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나요?

주일학교 모범 답안이 아니라 — 실제로, 기능적으로, 날마다. 나의 신앙 이력인가요? 신학적 정확성인가요? 사역의 성과인가요? 나의 고난인가요? 알아차리세요. 이름을 붙이세요. 그것을 십자가 앞에 가져오세요.


2. "더 열심히"가 "더 깊이 신뢰함"을 대신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어떤 관계, 습관, 혹은 소명 안에서 의지력으로 버티고 있지는 않나요? 그 영역을 그리스도를 위한 성과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재정향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3. 복음이 내가 살아가는 방인가요, 아니면 그저 내가 걸어 들어온 문인가요?

복음은 우리가 기독교 생활을 시작하는 방법만이 아닙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능력입니다(18절). 십자가가 감사하는 과거의 사건인가요, 아니면 날마다 힘을 길어 올리는 현재의 실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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